제1회 수상작

최우수상 - 고효숙 "아프리카에서 최정숙선생을 만나다"

2019.11.12 15:12 9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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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최정숙선생을 만나다

 

 

1. 퇴임의 시작

 

저는 서울에서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인 제주도로 내려와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결혼을 하면서 고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옮겨 30년을 교사로 보냈습니다.

집에서는 남편 뒷바라지와 아이들의 엄마로서 그리고 직장에서는 아직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사춘기 소녀들인 중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반복적인 일상 가운데서도 게으르지 않고 나름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의 예기치 않은 대수술과 지속되는 병으로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오히려 막내딸을 입양하는 계기가 되었고, 차즘 집안의 어려움에서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도움이 된 것은 저의 신앙이었습니다.

나이도 들어가고 시대의 급격한 변화가 교단에도 밀려오면서 교단에 대한 심한 자괴감이 들 무렵 저에게 의미 있는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것은 모교이자 직장인 <신성100년사> 집필하는 일이었습니다.

글재주도 없는 저는 망설였지만 고참 교사로서 또 역사과목을 담당하는 입장에서 후배들에게만 마냥 미룰 수는 없기에 수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작업을 하는 동안 저는 두 가지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신성100년사>의 원고를 쓰고, 동료들과 편집을 하면서 나도 이런 일을 할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을 새로 발견하게 되었고, 둘째는 신성학원을 거론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최정숙선생이라는 분을 새롭게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최정숙선생(1902~1977)에 대해서는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신성100년사> 만들면서 저는 그분에게 완전히 빠져들었습니다. 최정숙선생은 제주가 낳은 걸출한 여성교육자입니다. 민족이 암울했던 시절,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 시절 3.1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이후에는 야학운동을 통해 민족의 혼을 심으시며 독립을 염원하셨습니다. 더욱이 38세의 나이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을 하여 의사가 되셨습니다.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고향으로 내려와 해방 이후에는 의사로서, 민족교육자로서, 여성 운동가로서 그리고 신성여자중고등학교 무보수 교장과 초대 교육감으로 헌신하신 분이십니다. 무엇보다 그분은 독신으로 한평생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셨던 사랑의 실천자이셨습니다. 저는 그분의 이런 면모에 완전히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2. 새로운 도전

 

<신성100년사>를 완성한 저는 단지 모교에서의 역할을 다했다는 생각으로 정년 10년을 앞두고 명예퇴직(20112)을 과감히 신청했습니다.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계는 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최정숙선생님과 같은 일을 했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퇴직 후 몇 년은 바쁜 직장생활로 그동안 등한시했던 자연과 벗 삼아 고사리도 꺾고, 효소도 담그기 위해 산천을 돌아다니는 재미에 흠뻑 빠져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퇴직 이후에 삶에 전환점이 되는 만남을 갖게 되었습니다. 서울 죽림동 쪽방촌 노숙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한사랑가족공동체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살아가는 이 공동체가 가슴에 와 닿아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인들을 중심으로 제주후원회를 만들었는데, 한 구좌에 2천원씩, 60여명의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회원이 되어주었습니다.

저는 매달 통장으로 들어오는 후원금을 수합하여 송금하고 그 달의 참여인원과 송금현황 등을 회원들에게 보고하며 감사의 뜻을 전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회원들은 한 달에 한번 받아보는 감사의 메시지가 그렇게 기다려지고 기뻤다고 합니다. 그 결과, 매달 30, 40만원의 후원금을 송금할 수 있었고, 동시에 직접 꺽은 고사리와 직접 딴 귤도 함께 보내드렸습니다.

우리들의 정성은 쪽방촌 사람들에게도 큰 힘이 되어주었는데 이 나눔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의 작은 정성이 모여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은 직장생활에서는 결코 맛볼 없었던 보람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이렇게 쪽방촌을 후원하는 일을 하면서 어두운 시절에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던 최정숙선생의 삶을 조금씩 공감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가난한 나라에 학교를 설립해보자는 꿈을 꾸기 시작하였습니다. 퇴직 이후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3. 아프리카로

 

가난한 나라에 학교를 설립해보고자 한 결심은 30년 교단 경험과 무엇보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우울했던 저를 키워준 것이 학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학교는 저에게 더 없이 따뜻한 공간이었습니다. 저는 선생님들로부터는 넘치는 사랑을, 친구들로부터는 무한한 신뢰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러기에 남달리 학교에 보답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모교의 교사가 된 것도, 나름 교직생활을 열심히 했던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차를 마시며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제 꿈을 꺼내보였습니다.

 

여보! 내가 평생 월급을 타왔으니 앞으로 십년동안 오천만원만 쓰게 해주세요.”

그 돈을 어디에 쓰려고?”

지난 날 학교가 나를 키워주었으니 쪽방촌 후원처럼 여러 명이 돈을 모아 가난한 나라에 학교를 하나 세워 보려구요.”

그 말에 남편은 잠시 침묵을 했습니다.

십년이라는 기간은 너무 길다. 내가 도와 줄 테니 오년 안에 세워봐

 

남편의 이런 격려는 퇴직 이후 부부의 삶에 큰 자극이 되었고 가장 강력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뜻을 같이 해 줄 사람을 부지런히 찾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최정숙선생의 사랑의 실천을 이해해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선배와 친구, 동료교사와 후배 등 6명을 규합했고 신성을 상징하는 샛별드리를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나라에 학교를 세우는데 남학교 보다 여학교를 세우자 그리고 그 학교 명칭을 최정숙여학교라 하자고 의견을 모았고, 1년에 1천만 원 씩, 한 사람이 5천만원씩 부담하여 5년을 모으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말이 쉽지 평범한 가정주부로 되돌아간 제가 1년에 천만 원을 모은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 날 이후, 저는 모든 것들을 절약하며 6개월마다 만나는 모임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 꼬박꼬박 5백만원을 가지고 갔습니다.

저만이 아니라 모두가 이렇게 모았다. 저렇게 모았다고 힘들어 했지만 이는 나눔의 기쁨의 표현이어서 불평 없이 돈을 내기 시작해 샛별드리 통장에는 설립자금이 쌓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조혼과 가난으로 인간 대우를 받지 못하는 아프리카 여자 아이들을 돕고자 하는 희망으로 모임은 늘 웃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애쓰다보니 3년 만에 1억이라는 돈이 모였습니다. 그러자 어디에, 어떤 방법으로, 어느 정도의 자금이 필요한지 알아보기로 하였는데 이 때 만난 분이 한국희망재단이철순 상임이사님이셨습니다. 이사님의 삶은 우리네 인생과는 전혀 달라 충격이 컸습니다. 그 분의 삶 역시 최정숙선생과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여성, 노동운동가로 시작하여 해외 빈국을 돕는 튼실한 NGO단체를 이끌고 있는 최고의 전문가셨습니다.

이사님으로부터 부룬디 공화국을 소개받았고, 우리들의 의사가 전적으로 수용되어 아프리카 최초로 국립여자고등학교인 최정숙여자고등학교설립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무모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일들이 성사되기 시작했으니 정말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부룬디는 모두가 처음 듣는 나라였습니다. 중부 아프리카의 심장모양의 가장 작은 면적의 나라로 벨기에에서 독립하였지만 심한 내전으로 가난할 대로 가난한데다 정치적으로도 불안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위험국가로 분리되어 미수교 상태였습니다.

우리의 뜻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인 부룬디 정부에서는 학교 설립을 위해 2만평의 학교 부지를 내놓았고 기숙사동은 자신들이 지을 테니 나머지 교육시설을 갖춰달라고 했습니다. 이제 저의 퇴직 이후의 계획이 본격적으로 성사가 되기 시작하자 기쁨도 컸지만 솔직히 걱정도 많이 되었습니다. 퇴직금이나 타고 여행이나 다니며 조용히 살걸 그랬나 하는 불안과 후회도 없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당초 계획이었던 5년도 되기 전에 3년 만에 학교설립이라는 이 엄청난 일이 과제로 떨어지면서 모든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과연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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